중원경은 어디

from 역사 2009/08/03 18:29

 
 
 신라 문무왕 법민을 호국의 화신이라 부르는 까닭은 사후에도 나라를 지키고자 하는 염원이 컸기 때문이다. 사후에 용이 되어 동해를 침공하는 왜구를 막고자 바다 속에 유골을 묻어 달라 유명 한다. 경북 감포 해수욕장에 있는 수증릉은 이런 문무왕의 호국영혼을 담고 있다.

 삼한 통일의 위업을 달성한 후 왕은 어느 날 북부를 순행하다 중원경(中原京)에서 유숙하게 된다. 이날 밤 왕은 연회장에서 한 어린 무동의 춤을 보고 감회의 눈물에 젖는다. 무동이 바로 가야춤을 추었던 것이다. 그것은 가야금 선율에 맞춰 추는 너무 애잔하고 슬픈 춤이었다.

 왜 신라왕이 가야춤을 보고 눈물을 흘린 것일까.
 왕의 심장에는 숨은 가야의 피가 흘렀기 때문이다.  왕의 어머니는 가야 혈통인 김유신의 동생 문희가 아닌가. 문희는 바로 태종 무열왕김춘추의 아내. 왕은 어린 시절부터 엄마를 통해 가야 춤을 접해 왔을 가능성이 있다. 왕은 돌아가신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으로 더욱 감회에 젖었을 것이란 생각이 든다.

 중원경. 신라는 일찍이 충주 땅을 왕경 서라벌 다음가는 부도(副都)로 삼는다. 바로 북방공략과 경영의 거점으로 삼기 위함이었다. 그리고 왕경 호족과 가야세력을 이주시켜 살게 했다. 가야악인 우륵이 이곳에 살다 진흥왕을 만나고 비호를 받은 것은 유명한 얘기다. 그 후예들이 바로 문무왕을 만나게 된 것이다.

 이런 역사적 사실을 지닌 중원경 지금의 충주 땅에는 신라 유적이 많다. 안림동, 남산성,탑평리,누암리,미륵리는 물론 주덕, 살미, 금가 등등 곳곳에 절터요 산성유적이며 고분군이다. 아직도 더 많은 유적이 찾아질 가능성이 많다. 경주 다음으로 통일신라 와당이 가장 많이 수습된 곳이 충주가 아닌가 싶다.

 70년대 중반 어느 날 충주공전(지금의 충주대학 전신)의 김모학장님으로부터 전화를 받았다.  와당이 출토되었으니 빨리 와 보라는 것이었다. 학장님은 평소 충주사랑이 지극하셨던 분으로 평소 존경해 왔는데 제일 먼저 필자에게 알려왔던 것이다. 현지에 부랴부랴 달려가 와당을 접해 보았다.

 와당은 아무런 문양이 없는 주연이 오뚝 솟은 삼국기 말 신라 연화문 와당들였다. 안림동 속칭 염바다 마을 과수원에서 토양작업을 하다 찾아진 것이라고 했다. 너무나 아름답고 놀라운 발견이었다. 이는 신라의 중원경 설치와 귀족의 이주라는 삼국사기 기록을 입증하는 유물이었다.

 가금 탑평리 일대를 중원경 치소로 보는 학자분도 있다. 이곳은 본래 고구려의 국원성의 치소(중원고구려비)로 가까운 곳에 유사시 보민(保民) 기능을 한 장미산성이 위치하고 있으며 누암리 고분군등이 뒷받침 되고 있다. 진흥왕이 새로 점령한 지역을 순행 할 때 가야 악인 우륵을 만난 가궁 하림궁(河臨宮)의 위치도 이곳으로 비정 해 볼 수 있다.

 중원경의 역사적 미스터리를 풀어줄 탑평리 인근 대규모 건물지 등을 발굴중 이라는 소식이다.  이곳이 중원경의 치소라면 문무왕이 기야무동의 춤을 즐긴 곳도 여기이며 우륵이 제자들과 함께 불후의 가야금 음악을 장려한 곳도 여기일 것이다.

 지금도 그립고 가고 싶은 곳이 충주요 중원경이다.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Creative Commons License
Creative Commons License

'역사' 카테고리의 다른 글

중원경은 어디  (0) 2009/08/03
영동 월유봉(月留峰)  (0) 2009/08/03
Tag //